고 신경림 시인, 고향 선영에 영원히 잠들어

25일 고인의 마지막 길, 많은 문화예술인 함께 해

기자뉴스 김철관 기자 | 입력 : 2024/05/27 [13:28]

▲ 25일 오후 고 신경림 시인이 충북 노은면 연하리 선영에 영원히 잠들었다.   © 강민숙


지난 22일 작고한 고 신경림 (본명 신응식)시인이 고향인 충북 충주시 노은면 연하리 선영에 지난 71년 작고한 부인 고 이강임 여사 옆에서  25일 오후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24일 오후 서울대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25일 오전  발인을 해 고향 충북 충주시 노안면으로 향했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 유가족을 비롯한 '신경림 시인 대한민국 문인장 장례위원회' 염무웅 위원장, 도종환 집행행위원장 등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함께 했고, 고인이 태어난 연하리 마을 입구부터 하얀 만장을 앞세운 장례행렬이 이어졌다. 유해는 신경림 생가를 들려, 인근 선영에서 제를 마친 후, 아내 옆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고인이 묻힌 표지석에는 '시인 신경림(신응식), 1935. 4. 6 ~ 2024. 5. 22. <농무> <가난한 사랑의 노래> <남한강>의 시인 신경림 여기에 잠들다'라고 새겼고, 옆 표지석에는 '이강임(1940. 2. 5.~1971. 9. 30), 부 : 신경림(신응식)  자 : 병진, 옥진, 병규'라고 새겼다.

 

이곳 마을에는 고인의 생가가 조성돼 있고,  시 문화거리와 시비도 새워져 있다.  시 문화거리에는 < 동해바다> <별> 등 고인의 시가 전시돼 있고, 시비에는 대표적인 시 <농무>가 새겨졌다.  

 

 농무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벼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이곳 연하리에는 생전 원고지에 쓴 고인의 초창기 시 <갈대 >가 게시돼 있다.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슬픔을 <갈대>를 통해 잘 표현했다.

 

갈대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이곳에는 <갈대>에 대한 해설도 덧붙여 놓았다.

 

 갈래 : 자유시와 서정시

성격 : 상징적, 감각적, 철학적

주제 : 고독과 비애로서의 인간의 실존, 비극적인 삶에 대한 인식, 삶의 근원적 슬픔

표현 :  자연물을 의인회해 시상을 감각적으로 전개함,  외부대상을 통해 존재론적 문제를 주지적으로 다툼,  주정적 서정시가 아닌 주지적 서정시

구성 : 의인화를 통한 감각적 구성 

 

고 신경림 시인은 1935년 4월 6일 충북 충주시 노은면 연하리 470번지에서 태어났다. 동국대 영문학과를 졸업했고, 55년 '낮달'로 등단했다. 제6회 만해상을 비롯해 총 10여회의 화려한 수상 경력도 있다. 예술인 회원도 역임했다. 학창시절과 청소년 시절 등을 거친 1950년 후반까지 이곳 생가에 거주했다. 생가는 전통한옥양식으로 안채는 ㄱ자형, 사랑채는 ㅡ형이고, 원래는 초가지붕이었으나, 두 차례 개수하며, 현재는 스레트 지붕으로 변모했다.  안채는 크게 변형되지 않아 처마나 문짝은 당시의 모습 그대로이나 행랑채는 퇴락해 변형됐다고 이곳 관계자는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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