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통한 죽음의 풍경, 상상해 보자[서평] 송기호 한남대 교수의 '시간을 물고 달아난 도둑고양이'
기독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이 세상은 우리가 잠시 머무는 곳이며, 죽음은 우리가 영원히 머물 곳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일찍이 고 천상병 시인은 ‘귀천’을 통해 죽음에 대해 그저 이 세상으로 소풍 나왔다가 다시 제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바로 죽음을 통해 삶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책이 눈길을 끈다.
송기호 한남대 교수의 <시간을 물고 달아난 도둑고양이>(2022년 6월, 싱긋)는 죽음과 관련된 시를 통해 죽음에 대한 편견과 두려움을 따뜻한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특히 죽음의 의미를 소멸의 미학 속에 밀봉하지 않고 삶의 새로운 창조를 향해 나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죽음은 무겁고 고통스럽고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가볍고 투명하게 죽음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고나 할까. 죽음은 강 건너에서 환하게 불이 켜진 삶의 집을 들여다보는 도둑고양이 같다는 의미에서 책 제목도 ‘시간을 물고 달아난 도둑고양이’로 정한 것이 아닐까.
저자는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다고 말한다. 세속에서 명성을 얻는 자에게나 평범한 삶을 산 사람에게나 공평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죽음이 찾아오고 죽음은 시간을 보내어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준다는 점이다. 또한 죽음은 우리가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 예컨대 젊음, 아름다움, 사랑, 우정, 재능 등을 말이다.
특히 삶이 아무리 다양한 모습으로 모양을 바꿀지라도, 죽음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온다는 단순한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는 점도 강조한다.
사형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는 ‘떠날 시간이 됐으니 각자의 길을 가세, 나는 죽음으로, 자네들은 삶으로, 어느 것이 좋은지는 신 만이 안 다네'라고 했다고 알려져 있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삶과 죽음 중 어느 것이 좋은지, 죽어서 확인해 보겠다는 의미로 보인다.
사람은 일하고 슬퍼하고 배우고 잊고 돌아가리라 자신이 떠나온 어두운 계곡으로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이 구절은 18세기 후반의 시인 블레이크의 장시 ‘네 조아’에 나온 시구인데, 그는 몇 개의 키워드로 우리의 삶과 죽음을 요약한다. 삶은 노동과 슬픔으로 채워졌고, 우리가 사는 동안 필요한 물질을 얻기 위해 일을 해야 하며, 우리의 행복과 불행의 많은 몫이 일과 얽혀 있다. 무엇을 통해 삶의 의미를 얻기도 하고 살아가는 길이 죽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당대 노동자들의 삶이 노동과 슬픔(죽음)으로 채워져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는 셈이다.
죽음은 정의로운 사람이나 그렇지 않는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다. 영국에서 신분제가 엄격했던 시대에 살았던 세익스피어는 죽음을 삶의 고된 노역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저작 <심벨린>에서 밝힌다. <심벨린>은 로마제국시대 켈트족의 브리튼 왕 큐노벨리누스의 전설을 바탕으로 세익스피어가 자유롭게 재구성한 작품이다.
“죽음 앞에 갈대와 참나무도 차이가 없고, 제왕이나 학자, 의사 같은 이들과 청소부 사이도 차이가 없다. 죽음은 신분의 차별과 서러움으로부터 해방이고, 세상의 모든 억압에서 풀려나가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억압에서 풀려난 자들이 죽음에서 누리는 축복은 평화와 안식이다.” - 본문 중에서
신의 공간에 묻히면 부활에 대한 가능성이 커진다는 믿음에서 영국 런던 시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3000여명 이상의 사람들이 석관에 안치됐거나 바닥의 석판 아래 묻혀 있다. 영국 스트랫퍼드의 성삼위교회 내 영국의 문호 세익스피어가 묻혀 있다. 그의 석판 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친애하는 이여 부탁하노니, 여기 묻힌 이를 파내지 말기를, 이 석판을 건드리지 않는 이에게 복을, 내 유골을 움직이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기를.”
죽은 자는 이제 세상살이의 고단함에서 벗어나 평온한 안식을 누리고 있으니 이를 방해하지 말라는 뜻을 담았다.
이런 의미에서 터키 사상가 메흐메트 무라트 일단의 격언 ‘이따금 묘지를 찾아가면 비석의 묘비를 읽어라, 삶의 어두운 얼굴에서 배울 것이 그토록 많을 것이다’가 연상된다. 타인의 묘비를 읽는 것은 곧 자기가 닥칠 운명을 미리 읽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익스피어는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의 관계를 뛰어난 문학적 비유로 설명한다. 그는 <뜻대로 하세요>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온 세상은 하나의 무대이고, 모든 남녀는 그저 배우일 뿐이어서, 무대에 오르고 퇴장하나니.” - 본문 중에서
그는 세상을 커다란 하나의 연극무대로 바라봤고, 사람들은 저마다 이 세상이라는 무대에 오른 배우로 상정했다.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자신의 배역이 끝나면 무대 뒤로 모두 퇴장해 다시 등장하지 않고, 그 무대에는 다른 배우가 계속해 오르고 퇴장하듯, 인간의 삶과 죽음도 배우와 같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저마다 세상이라는 연극무대에 오른 배우이지만, 누구도 그 무대에 영원히 머물 수 없다는 것이다. 주어진 배역을 연기하다 그것이 다 끝나면 무대 뒤로 퇴장해 다시 등장하지 않은 배우의 운명이 곧 인생이고, 삶과 죽음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세익스피어는 인생무대의 일곱 단계 변화(7막 인생)를, 연극무대에 비유해 아기 역, 학생 역, 애인 역, 군인 역, 법관 역 그리고 광대노인 역, 마지막이 제2의 어린아이 역으로 나눴다. 인생 7막의 구분은 삶의 여정도와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대략 그 골력을 따르고 있다.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 등 모든 죽음은 사회적지위를 향상시킨다. 사회적지위가 낮은 죽음도 그가 살아 누리지 못한 정중한 예우를 누린다. 그가 장지로 나갈 때 마차를 타고, 시종들이 호위하듯 사람들이 무리지어 그 마차를 뒤따른다. 장지에 이르면 엄숙한 의식을 치르고 정중하게 예를 갖춘다. 죽음이 베푸는 특별한 신분과 지위를 얻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탄생, 성년, 결혼, 출산 등을 특별히 여겨 기념한다. 장례(죽음)도 그런 특별한 일중 하나지만, 대개 장례는 특별하게 대접한다. 우리나라도 관혼상제에 따라 상례식을 한다.
아마도 죽은 이를 다시 볼 수 없어 그렇겠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산자들이 사자의 장례식에서 자신의 운명을 읽기 때문이 아닐까. 타인의 죽음이 곧 나에게도 닥칠 일이라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들기 때문일 것이다.
삶은 언제나 죽음 위에 세워진다. 또한 부모의 죽음 위에 자식의 삶도 세워진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삶을 이어온 방식이라고 저자는 일갈한다.
“우리는 죽음의 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곳에서 다시 돌아오는 이가 없기에, 우리가 죽음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살아 있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거나 혹은 상상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본문 중에서
생명은 우리에게 단 한번 주어지는 것이기에 소중하다. 그 생명이 유지되는 다양한ᅟ방식에 대해 획일적인 기준을 부여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삶과 죽음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의 문제는 어떤 식으로 살아 있기를 원하는가에 관한 자기 신념의 문제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은 영미 문화권의 시가 중심을 이루지만, 다른 문화권의 시도 두어 편 들어 있다. 특히 이 책은 시를 통해 삶에 가려진 죽음의 여러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고 각인된 문장이 있다.
‘두려운 진실은 묘지가 모든 사람의 최종 목적지라는 것’과 ‘우리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와 죽으면 대지의 자궁으로 들어가 눕는다’라는 것이다.
저자 송기호는 충북대와 서울대 대학원, 미시간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현재 한남대에서 영시를 가르치고 있다. 비정전 작가와 주변부로 내몰린 사람들의 삶을 다룬 문학작품에 관심이 많으며, 영국의 여성노동자 시인들에 관한 논문 여러 편을 썼다. 역서로 <대단한 모험>이 있다.
<저작권자 ⓒ 기자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