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제로의 '론다니니 피에타'의 함의는?

[서평] 제일 조선인 2세 서경석 교수의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

기자뉴스 김철관 기자 | 입력 : 2022/08/21 [20:12]
▲ 표지     © 반비


“역사를 초월해 이름을 남긴 이탈리아 회화, 조각, 추모비 등의 유적지의 흔적을 찾아 쓴 솔직하고 담백한 글이 마음을 울린다. 속절없이 지나간 세월과 사라져버린 이들의 발자취를, 밝고 희망 섞인 글로 표현했다고나 할까. 특히 나치의 탄압에 희생된 사람들을 접하면서 인권과 인권신장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본다.”

 

재일조선인 2세인 서경식 전 도쿄케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교수가 2018년 출판한 <나의 이탈리아 인문기행>(2018년 1월, 반비, 최재혁 옮김)을 읽고 느낀 점이다.

 

저자는 유대계 이탈리아인으로 나치시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자살(1987년) 현장이자 마지막까지 살았던 이탈리아 토리노의 집 그리고 그의 묘지 등을 둘러보고 고찰한 책 <시대의 증언자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창비, 2006년)를, 출판해 큰 이목을 집중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나의 이탈리아 인문기행>에서도 2014년 세 번째 이탈리아 토리노 방문을 언급하며, “레비를 향한 끊임없는 관심이 나와 이탈리아를 강하게 묶어주고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환한 프리모 레비의 첫 저서 <이것이 인간인가>는 전쟁이 끝난 2년 후인 1947년 간행됐다. 1972년 개정판 ‘젊은이들에게’라는 제목의 서문이 눈길을 끈다.

 

“지금, 파시즘은 패배했다, 이탈리아에서도 독일에서도, 자신들이 바랐던 전쟁에 의해 일소됐다. 두 나라는 완전히 새롭게 모습을 바꾸고 폐허로부터 일어나 힘겨운 재건의 길을 걷고자 했다...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는 ‘안심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는가?’라는 걱정과 두려움을 품을 수밖에 없다.” - 본문 중에서

 

토리노에 레비의 무덤이 있다. 묘비에 ‘174517’이라는 숫자 새겨져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을 때 왼족 팔뚝에 문신으로 새긴 죄수번호이다. 프리모 레비의 친구였던 줄리아나 테데스키 씨도 아우슈비츠 생환자다, 1965년 아우슈비츠 해방기념일에 레비와 수용소를 함께 방문했다. 그녀의 왼팔에도 죄수번호를 새긴 문신이 남았다.

 

“이 숫자를 레이저 수술로 지운 사람도 있지만 나는 결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요. 오히려 날씨가 추워도 반팔을 입고 되도록 사람들의 눈에 띄게끔 하며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가야할 의무니까요, 하지만 왜 그런 곳에 전화번호를 메모해뒀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 분문 중에서

 

저자는 기행을 하며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의 화가 카라바조의 ‘성 마테오의 영감’ ‘ 성 마테오의 소명’ ‘성 마테오의 순교’와 시스티나 성당 회화관 있는 카라바조의 ‘그리스도의 매장’을 봤다. 또한 이곳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 히에로니무스’와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변용‘ 그리고 과거에 봤던 니콜라 푸생의 ’성 에라스무스의 순교‘와 재회한다. 니콜라 푸생의 ’성에라스무스의 순교‘는 열 네명의 수호성인 중 한명인 성 에라스무스가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로 배가 찢어지고 온갖 고문 끝에 기중기형틀에 묶여 내장을 쏟으며 순교했다는 전설을 그린 작품이다.

 

“예전에 나는 내 몸으로 직접 닥쳐오는 듯한 현실감을 느끼면서 이 그림을 바라봤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나 자신이 오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지도 않았다... 지금의 나는 이렇게나 오랜 역사를 거치고 이토록 수많은 잔혹함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관한다.” - 본문 중에서

 

로마 게토 지역 벽에 붙여진 추모비는 나치에 의해 학살된 유대인을 추념한 내용을 담았다. 1943년 10월 16일 토요일 이른 아침 이탈리아에서 첫 번째 유대인 일제 체포가 시작됐다. 체포된 1022명은 가축운반용 수레로 열여덟 대에 실려 아우슈비츠로 압송했다. 이송 과정에서 물도 음식도 주지 않아 적지 않은 사람이 죽었다. 1022명 중 전쟁이 끝나고 살아난 사람은 15명이었다.

 

“고대도 중세도 아닌 그리 얼마 지나지 않은 과거에 일어난 일이다. 21세기의 지금도 우리는 가혹하고 무참한 현실에서 빠져나올 방도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다시금 막막해 진다.” - 본문 중에서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1884년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한 항구도시에서 태어났다. 14살 때 그림공부를 시작했고, 16살에 결핵에 결려 환자가 된다. 1906년 1월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에서 활동을 시작한 그는 파블로 피카소(1881~1973), 앙드레 드랭(1880~1954)등과 교류했고, 1917년 미술학교에서 알게 된 잔 에뷔테른과 동거를 시작했다. 둘은 1919년 7월 정식 결혼서약을 했지만, 모딜리아니가 1920년 1월 24일, 결핵 뇌수막염으로 세상을 등진다. 마지막 남긴 말은 ‘그리운 이탈리아!’였다. 그가 죽은 이틀 후 잔 에뷔테른도 임신 9개월의 몸으로 자살한다. 당시 시인 프란시스 카를로는 모딜리아니의 생애를 이렇게 표현했다.

 

“빈곤과 고생, 부정으로 인한 진부함에서 도피하고 초월하려는 바람, 죄에 대한 갈망, 주도면밀한 무리들에게 비웃음의 씨앗이 되는 것조차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 그리고 이런 태도로 일관한 평생, 그런 것이 바로 예술가의 삶, 건곤일척의 생애이다.” - 본문 중에서

 

잔 에뷔테른의 가족이 유대인과의 결혼을 반대했기에 두 사람이 죽은 후 10년이 지나 함께 잠들 수 있었다. 프랑스 파리 페르 라세즈 묘지의 모딜리아니 묘비명에는 ‘이제 영광을 차지하려고 한 순간, 죽음이 그를 데리고 간다’를, 잔 에뷔테른 묘비명에는 ‘모든 것을 바친 헌신적인 반려’라는 말이 기록돼 있다.

 

이탈리아 페라라의 베로나와 파도바에 1943년 11월 15일 새벽 트럭을 몰고 나타난 파시스트군이 반파시스트 지식인, 변호사, 유대인 등 열 한명을 사살하는 시민학살사건이 일어난다, 시신은 에스텐세 성의 해자 근처에 산처럼 쌓아 방치해 놓고 파시스트들은 밤새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는 것이다. 에스텐세 성벽에 붙어 있는 희생자 추모 명단이 이를 확인시켜준다.

 

밀라노 노베첸토 미술관에는 주세페 펠리차 다 볼페도(1868~1097)의 대표작 <제4계급>이 있다. 교회(1계급), 귀족(2계급), 부르조아(3계급)에게 확대를 당해왔던 제4계급인 노동자의 각성을 그린 작품이다.

 

“화면 속에는 남성 두명과 여성 한명이 선두에 서 있고, 그 뒤를 따라 노동자들이 힘차게 행진하고 있다. 이탈리아와 유럽 전역의 진보파와 사회주의들의 상징이기도 한 작품이기도 하다.” - 본문 중에서

 

이 그림을 그린 주세페 펠리차 다 볼페도는 피에몬테 지방의 한 지역에서 태어났고, 1907년 아내의 돌연한 죽음 이후, 아틀리에에서 40세 나이로 목을 매 자살했다. 참고로 노베첸토 미술관에는 피카소, 모딜리아니 등 아방가르드 화가와 움베르토 보초니, 조르조 모란디, 조르조 데 키리코, 아르투로 마르티나, 마리오 시로니 등의 20세기 이후 작품 약 350점이 전시돼 있다.

 

노베첸토 미술관 옆 건물인 레랄레 궁에는 마리노 마리니의 조각과 회화가 전시돼 있다.

 

특히 전시실에는 마리노 마리니(1901~1980)의 다양한 인물 흉상들이 나무처럼 늘어서 있다.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없는 묘지의 초상 조각과 비슷한 흉상을 만들었다. 마리니는 자신의 초상 조각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나의 예술적 양심과 개인 생활을 동일시함으로써 예술을 지배하려 하는 파시즘과 제국주의의 정열에 반항했다. 그리하여 너무나 재현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전부 피해갔다.” - 본문 중에서

 

1차 세계대전 이후, 토리노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지였다. 토리노대학을 나온 안토니오 그람시도 1891년 이곳 사르데냐 섬에서 태어났다. 노동운동에 몰두한 그는 1921년 이탈리아 사회당에 가입했고, 이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한때 소련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귀국했고, 1926년 파시스트 정권에 체포돼 감옥에서도 사색과 집필을 이어가며 서른 세권에 이르는 <옥중수고>를 남겼지만 1937년 4월 석방 직후 뇌출혈로 사망했다.

 

미켈란제로 작품인 파리 루브박물관의 ‘죽어가는 노예’ ‘반항하는 노예’, 피렌체의 ‘다비드’, 바티칸의 ‘피에타’ 그리고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 등이 작가로서의 그의 진면목을 확인시켜준다. 이곳 스포르체스코 성에 전시된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그의 마지막 미완의 작품으로 남아 있다. 그가 조각한 대부분의 피에타상은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 조각상은 어머니가 뒤에서 아이를 감싸 안아 올리며 서 있다. 무덤 구멍으로부터 죽은 몸을 들어 올리는 모습, 지금 바로 지상을 떠나 승천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89세의 미켈란젤로가 고투 끝에 마지막이자 미완의 작품이다. 20대 때 조각한 ‘다비드’, ‘피에타’ 등의 작품과 비교해 본면 완성도 측면에서는 부족하다. 하지만 완성을 위해 노력하다가 미완의 피에타를 남기고 탈진을 해버린다. 하지만 저자는 이야말로 ‘미완성의 완성’이었다고 강조한다. ‘생성하는 완성’으로의 작품이었다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평을 쓴 나는 이탈리아 여행에서 로마, 베네치아, 트리에스테를 가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를 자주 여행한 저자는 트리에스테에 가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트리에스테는 요트를 즐길 만큼 여유로움이 있는 항구도시이다. 이곳도 유대인 거리와 나치즘·파시즘 폭력의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특히 정비소를 개조한 유대인 수용소인 리시에라 디 산 사바도 가볼만한 곳이다.

 

이 책은 저자가 기행을 하면서 단순히 인문적인 사실과 현상에 대한 고찰 뿐 만 아니라, 단편적이라 할지라도 직접 찾아가 그 지역의 풍토를 온몸으로 느끼며, 글을 전개했음이 느껴졌다.

 

저자는 1970년대 ‘제일조선인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된 형들(서승과 서준식)의 석방과 한국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기 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은 이후 사색과 글쓰기, 강연으로 이어졌다.

 

1995년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상을, 2000년 <시대의 증언자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마르코폴로상을, 2012년 민주주의 실현과 소수자 인권신장의 기여로 제6회 후광 김대중 학술상을 받았다.

 

저서로 <나의 서양 미술순례> <청춘의 사신>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 시대를 건너는 법> <고뇌의 원근법> <언어의 감옥에서> <나의 서양음악 순례> <역사의 증인 제일조선인> <나의 조선미술 순례> <시의 힘> <내 서재 속의 고전>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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